육식 문화의 역사 및 한민족의 정체성
육식 문화의 역사 및 한민족의 정체성
  • 한우마당
  • 승인 2018.03.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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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문화 이야기

본 글은 한우자조금 조사연구용역사업 중 ‘한우와 한반도 육식문화의 변천사 및 한민족의 정체성’을 주제로 강원대학교에서 최종보고한 자료이오며, 본지에서는 축약하여 기고함을 알려드립니다.

1. 고대 한민족의 육식문화

① 상고시대 한민족의 육식문화

고조선과 부여 시대에는 농경의 발달로 곡물 섭취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육식이 식생활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부여는 최고의 관직명을 가축 이름으로 하고, 말과 소를 바치면 중죄도 사면해 줄 정도로 정치·경제에서 목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여의 제천행사인 영고는 북방민족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샤머니즘에 근간한 수렵축제라고 할 수 있다. 제천행사를 할 때는 우선 사냥물을 바치는 의식을 진행한 뒤에 제가회의를 열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소는 축제의 동물성 식재료가 되어 신과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육식 문화를 형성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도 부여의 영고를 계승하고 있다.

② 고구려의 육식문화

고구려에서 소는 축력과 고기를 제공하는 고마운 가축일 뿐만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었기에 신성시되었다. 소를 전용으로 관리하는 독립 공간으로 외양간이 있었다는 건축학적 자료를 통해서, 소가 코뚜레를 하고 있거나 여물을 먹는 모습 등의 그림을 통해서 고구려인들이 체계적으로 소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삼실총이나 오회분 벽화에서는 소가 농경을 주관하는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상문화로서의 수렵은 고구려인들이 풍부한 육식문화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고구려인들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고, 소는 함부로 도살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주로 제천행사 때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고구려의 대표 음식인 ‘맥적’은 이름은 다르지만 몽골계나 숙신계 같은 수렵과 샤머니즘적 전통을 공유하는 북방민족들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제사음식이다. 맥적은 제천행사에서 신과 공유하는 음식이었다가 왕이나 귀족들이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연회에서 먹게 되면서 잔치음식이 되었다.

③ 백제와 신라의 육식문화

범부여계의 지배 집단과 마한계의 피지배 집단으로 구성된 백제는 육식과 곡식이 골고루 분포된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백제에서 동물성 식재료를 획득하는 방법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가축의 사육을 통해서다. 특히 사슴을 신성시하였던 백제의 왕들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사냥에서 획득한 사슴을 희생제물로 사용하였다.

신라는 음식 문화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것을 수용하면서도 포와 젓갈 같은 독특한 육류 가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육류 가공 기술은 발달된 목축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라 귀족들은 여러 섬에 가축을 방목하고 필요할 때 사냥했다. 국가에서는 원곡양전, 월지악전과 백천환숙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고 가축을 관리하였다. 제사는 일반 서민이 육식할 기회로, 이때에는 소나 돼지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제사가 끝난 후에는 이를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다.

전통 한우 품종인 칡소
전통 한우 품종인 칡소

2. 고려시대의 육식문화

① 고려 전반기의 육식문화

고려 전반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고려왕들은 여러 번에 걸쳐 소 도축금지령을 내리고 금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에 준하는 자자형(刺字刑)을 내려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시대에 우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사 이래로 육식을 즐겨온 한민족의 특성으로 볼 때 육식 억제는 지키기 어려운 사회 통념이었고, 기회만 생긴다면 언제든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 전반기에 소고기는 몸을 보존하는 보양식이나 최고위층에 바치는 고귀한 선물로 사용되었다. 육식의 절제 속에서도 고려인들에게 소고기는 귀중한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② 고려시대의 목축

고려시대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 목축업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도 통일신라처럼 서남 도서 지역에 목장을 설치하고 말과 소를 방목하였다. 1159년 축우마요식(畜牛馬料式)을 제정해 사료를 계절에 따라 다르게 제공했으며, 몽골 지배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우량종을 개발하고 낙인을 이용해 체계적으로 목축 기술을 발달시켰다.

③ 고려 전반기의 음식문화

고려 전반기에 육식 문화가 위축되면서 주로 생채를 밥에 싸서 먹는 쌈 채소 음식이 유행했다.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시대에는 연회에서 육식이 절제되면서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달콤한 기호식품이 발달했다. 육류는 태묘제, 산천제, 성황제 같은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었는데 공식적으로 음복을 진행하기는 했으나 왕이 제사에서 육류를 식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우유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용으로 이용됐는데 왕이나 최고위층의 귀족들이 보약처럼 애용했다.

④ 고려 후반기의 육식문화

몽골 문화는 고려인들에게 육식으로 복귀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되어, 고려 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여기에 진일보한 고려의 목축 기술은 소의 사육 두수를 많이 증가시켜 고려인들이 육식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아가 이렇게 형성된 고려의 음식은 오늘날의 한국 음식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고려 후반기에 몽골의 영향으로 도입된 소의 이마를 타격하는 도축법은 고기의 풍미를 증가시켜 고려인들의 육식 선호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육식 열풍은 고려인들이 소를 농우만이 아니라 식우로도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⑤ 구이와 탕 중심의 고려 후반기의 육식 문화

고대의 제천 의식이나 연회 음식이었던 맥적이 고려 후반기에 육식 문화의 부활과 함께 되살아났다. 다만 이 시기는 샤머니즘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조리 과정이 복잡한 통구이 형태를 버리고, 소고기를 분절해 꼬챙이에 꿰어서 굽는 형태로 조리 과정이 간편해졌다. 

이로써 고대인들이 즐겨 먹었던 맥적은 고려 후반기에 ‘설야적’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였고, 조선에서는 ‘너비아니’로 부르다가 1960년대는 불고기로 통칭되었다.

한민족의 대표적인 음식인 국은 몽골의 문화가 유입된 후에 채소로 끓인 국에서 고깃국으로 변모했다. 몽골은 기후의 영향으로 국물 음식이 발달했는데 몽골 국물의 특징은 맹물에 고기와뼈를 넣고 푹 삶는 것이다.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깃국인 곰탕과 설렁탕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전반기에는 없었던 조리 방식이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몽골로부터 전달받은 요리법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난로회 풍습을 그린 김홍도의 설중난로도
조선시대 난로회 풍습을 그린 김홍도의 설중난로도

3. 조선, 한우 육식 문화의 황금기

① 정부의 우금령 시행

조선은 농업 생산력 향상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금정책을 실시하였다. 1398년(태조 7) 9월에 처음으로 우금령을 내린 이후 역대 국왕들은 비록 횟수와 강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지속해서 우금령을 반포하였다. 아울러 우금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다.

처벌 내용을 보면 자기의 소를 도살한 자, 남의 소를 사서 도살한 자,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 순으로 점점 형량이 무거워졌다.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소 도살의 금지와 단속, 처벌에도 불구하고 도살은 널리 자행되었다. 이는 소극적인 단속, 경미한 처벌, 일관성 없는 우금정책, 그리고 이에 반해 많은 이익과 백성들의 소고기 선호 등 때문이었다.

② 양반사대부들의 소고기 인식

양반 사대부 일부는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고기, 즉 금육(禁肉)으로 인식하였다. 이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는 정부의 금령을 지키기 위해, 생전에 소고기를 먹고 싶어 하던 부모에게 가난 때문에 사 드리지 못한 죄책감 때문, 평소 소고기를 좋아하던 부모에 대한 그리움 때문, 평생 농사일에 부려먹던 소를 잡아먹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 자신의 생활신조나 가치관 때문 등 다양하였다. 하지만 소고기를 먹지 않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대부분 양반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으로 소고기를 즐겨 먹었다. 그들은 소고기를 가장 맛있고 귀한 별미 음식 재료로, 또 보양식 재료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소고기를 다른 음식의 맛이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또 그들은 접대에서 소고기의 유무를 가지고 후대와 박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나아가서는 접대자의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아울러 소고기를 선물 받거나 대접받는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소고기는 제수용, 연회용, 하사용, 접대·선물용, 보양·약용, 호궤용, 벽사용, 무기 제조용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③ 소고기 선호와 돼지고기 기피 현상

우금정책 실시 하에서도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고기에 집착하였다. 선조들은 소고기 맛을 으뜸으로 인식하여 소고기를 먹지 않는 자들을 특이한 식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핀잔을 주거나 조롱하였다. 이처럼 유별나게 소고기에 열광한 것은 소고기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고기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소고기와 대체재 관계에 있는 돼지고기는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다. 돼지의 사육 두수가 많지 않아 고기를 맛볼 기회가 별로 없어 그 맛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래가 활발하지 않아 소고기보다 비싼 가격도 이를 부추겼다. 심지어 돼지고기는 건강에 해롭고 질병을 유발한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다.

④ 난로회 중심의 양반들 소고기 소비문화

조선 후기 양반사대부들 사이에는 소고기 먹는 모임, 난로회(煖爐會)가 유행하였다. 추위를 막기 위해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양념 한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 난로회는 겨울 동안 볼 수 있는 풍속이었는데, 주로 10월에 열렸고, 특히 겨울의 시작인 음력 10월 초하루에 모임을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난로회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늦어도 17세기 후반에는 조선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양반사대부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산돼 널리 유행하였다. 이에 국왕도 신하들과 더불어 난로회를 즐겼다.

⑤ 국밥 중심의 서민들 소고기 소비문화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일반 서민들은 구이 등을 통해 소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보다 값싼 내장 등의 부산물을 이용하여 국이나 탕을 끓여 먹었다. 이에 조선 말기에는 소의 모든 부위를 국물로 만들어 먹는 국밥문화 즉 탕반문화가 유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소고기를 이용한 국(탕)을 재료에 따라 분류하면 내장으로 만든 국에는 양탕이 있었고, 살코기와 내장을 함께 넣어 만든 국에는 고음·잡탕·육개장 등이 있었다. 또 뼈가 붙은 고기로 만든 국(탕)에는 족탕과 꼬리탕이 있었고, 살코기만을 넣고 끓인 국에는 우갱, 즉 소고깃국이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때 가난하고 배고프던 일반 서민들이 가장 즐겨 먹었던 소고기로 만든 국은 설렁탕이었다. 설렁탕은 당시 소탈한 서민 음식의 상징이었다.

외국인도 좋아하는 불고기는 근대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외국인도 좋아하는 불고기는 근대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4. 근대이후 한국의 육식문화

① 요리집과 음식점의 탄생

일제 강점기 육류 소비의 중심지는 종로 일대에 있던 요리점과 음식점들이다. 대표적인 요리점인 명월관과 식도원 등은 기생들의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궁을 나온 숙수들을 고용해 궁중 음식을 재현시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요리점의 대표 음식은 양념한 한우와 한우 완자를 가득 넣은 신선로로 외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아서 조선 음식은 신선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양반들이 피해 다녔던 종로의 뒷골목인 피맛골의 주막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이나 술국 등을 많이 팔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런 명맥이 이어져서 이곳은 근대적 음식점들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문설넝탕’은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1900년대 초에 개업한 이래 지금까지도 설렁탕을 판매하고 있다. 1930년대 문을 연 청진옥은 종로의 땔감 시장을 찾아오는 나무꾼을 상대로 새벽에 해장국을 팔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②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한우고기 음식

설렁탕은 근대 음식점의 탄생을 견인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음식이다. 설렁탕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소고기, 국물과 밥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용통조림을 만든 후에 버린 소의 부산물을 가져다가 만들었기에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갈비는 선술집의 안주로 인기를 끌다가 음식점의 정식 메뉴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대에 평양냉면집에서 갈비구이를 팔면서 냉면과 갈비의 환상적인 조합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 갈비구이도 설렁탕처럼 소의 부산물로 만들었기에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대중 음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③ 경제 성장과 한우고기 소비의 증가

육류 소비는 국민 소득의 증가, 산업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소고기 소비량도 연평균 6.5%씩 상승하였다. 2001년 소고기 시장의 전면적 개방에 맞서 한우 농가는 한우고기의 품질 향상에 주목했다.

즉,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한 한우고기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혈통 관리, 브랜드 한우 출시, 유통단계 이력제 등의 고급화 전략을 추진했다. 이러한 한우 농가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현재 한우는 맛있는 고기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④ 불고기, 갈비 그리고 등심의 전성시대

숯불 석쇠 불고기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우의 하급 부위를 양념해 육수를 부어 먹는 육수 불고기 형태로 바뀌었다. 육수 불고기는 국물과 소고기를 좋아하는 한민족의 취향과 잘 맞아 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육수 불고기는 입학식, 졸업식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1980년대 이후 외식 메뉴에서 불고기가 쇠퇴하고, 한우 갈비나 한우 등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중산층들은 기존의 설렁탕이나 육수 불고기 등의 탕을 먹는 것보다는 야외에서 고급육을 구워 먹는 육식문화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육식을 구이 형태로 즐겨왔던 한반도의 육식문화가 경제 성장과 함께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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