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바비큐 역사 매우 오래되었다
한민족 바비큐 역사 매우 오래되었다
  • 한우마당
  • 승인 2019.07.0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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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기 대한스포츠바비큐연맹

고려시대 설하멱 한국식 바비큐 요리의 진수

소가 이 땅에 언제 도래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육이 시작되었고 우리 땅에서 농사에 이용된 것이 BC200~BC100년경으로 보는 설만 전해질 뿐이다.

소는 농경사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축이었다. 그래서 우사(牛舍) 또한 사랑채 옆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는 우리민족의 생존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유생산을 하는 유우(乳牛)와 고기를 생산하는 육우(肉牛), 일을 하는 역우(役牛)로 구분되어 사육되기도 하였다.

농사가 전부인 과거의 삶에서 소는 또한 재산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했던 것으로 근래까지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를 시켰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경험한 세대이기에 사실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전통재래 황우를 한우라고 부른다. 한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단기 4291년, 서기로는 1958년 10월에 작성된 국무회의 안건에 한우수출에 관한 건으로 처음 등장한다.

일본으로 한우를 수출해야 하지만 검역에 걸려서 수출을 못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과거 1928년부터 연간 6만두의 한우가 수출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한우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이 때를 시점으로 이미 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한우는 보스 프리미게니우스(Bos primigenius)와 보스 인디쿠스(Bos indicus)의 교잡으로 번식되어 한반도 안에서 다른 품종과의 교잡없이 동종번식하여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체격이 중국 남부에 서식하는 황소(yellow cattle)와 흡사해 한국황소(Korean yellow cattle)라고 부르는 외국인도 있다.

보통 황갈색을 띠며 몸무게는 수소 약 460㎏, 암소 370㎏이며, 어깨높이는 각각 135㎝와 125㎝이다. 각 지방의 토질, 농업구조, 사양관리 및 기후 등에 따라 체격의 차이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통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크다.

성질이 온순하여 다루기 쉽고, 병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며 동작이 경쾌하다. 특히 다리와 발굽이 튼튼하여 장기간 일을 시켜도 잘 견디며 번식력도 좋은 편이다. 나쁜 환경에서도 사육할 수 있고 피부가 두껍고 질겨서 훌륭한 가죽을 생산한다.

육질과 비육성이 좋고 현재는 농업의 현대화로 예전의 일소에서 고기소로서의 가치에 역점을 두고 번식시키고 있다.

한우는 우리의 생존과 생활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 할 수 있다. 귀하게 여겨졌던 소가 음식으로 이용된 경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역사를 거쳐 오면서 다양한 조리방법으로 요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나 ‘한서동이전’에 보면 부여국이나 고구려의 위치가 가축을 기르고 수렵(役牛)하기에 적당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국은 상고시대부터 양축(養畜)을 잘했고, 고구려는 수렵에 능했음을 알 수 있었음으로 이러한 환경에서 맥적(貊炙)과 같은 고기요리가 생겨나고 발달하였으며 그렇게 시작한 구이요리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부터 발전한 우리민족의 고기요리 솜씨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오늘날 한국 바비큐문화의 뿌리가 되어 아직까지 대회나 경기중심에 머물러 있는 세계의 바비큐 문화를 세계 최초의 스포츠바비큐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 층 더 섬세한 바비큐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우리민족의 바비큐 문화 우수성을 정리하면,
- 한국은 농업국이었지만 곡물음식과 고기음식이 병행 발달하였다.
- 무속행의, 고사행의, 가례, 제향, 시, 생을 으뜸으로 여겼다(기를 때는 ‘축’, 제물일 때는 ‘생’이라 한다.)
- 선사시대 사냥도구 출토로 미루어 볼 때 고대에는 수렵을 숭상하고 가축을 사육하던 생활유습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부여국의 관직명에 마(馬), 저(猪), 구(狗), 견(犬),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가 있는 것으로 보아 축양(畜養)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 삼국시대 신라에 양전(羊典), 육전(肉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 신라 신문왕 3년에는 폐백품목에 포(脯)가 있어 이를 통해 건육(乾肉)의 가공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시대에는 전생서(典牲署)가 있어 소사관직(所司官職)이 제향이나 빈객을 위한 가축 기르기를 담당했다.

우리의 바비큐 문화는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그 기록이 남아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각각의 재료에 맞게 세분화되어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재료의 부족함과 한계를 넘기 위해 재료를 부위별로 소중하게 다루었으며 그만큼 조리법이 섬세했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의 양념으로 자연의 맛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최고의 음식문화로 발전시켜 왔다.

우리의 고기문화는 고려시대 설하멱과 고구려 맥적, 조선시대 너비아니로 이어지는데 이 중에 필자는 고려시대 설하멱을 최고로 꼽는다.

여기에서는 ‘증보산림경제’에 실린 설하멱(雪下覓), 또는 설야멱(雪夜覓)이라고도 하는 구이음식을 소개해 본다.

 

음식전문 채널 올리브TV의 한식대첩에서 선보인 설하멱 조리 과정으로 얼음으로 고기의 온도를 낮추고 있다. 사진은 올리브TV 화면 캡쳐
음식전문 채널 올리브TV의 한식대첩에서 선보인 설하멱 조리 과정으로 얼음으로 고기의 온도를 낮추고 있다. 사진은 올리브TV 화면 캡쳐

이 음식은 ‘눈오는 날 밤에 찾는다’라고 해서 알려진 음식으로 ‘쇠고기를 너비 2마디, 길이 6마디, 두께는 손바닥만하게 저며 칼등으로 두드리고 꼬챙이에 꽂아 소금, 기름, 간장(때로는 술, 식초도 사용)을 발라 삭아든 불(탄화, 炭 火)에서 굽는다. 간장이 싫다면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 고려시대의 명물로 지금의 제수용 육적과 크기나 다루는 방법에서 동일하다.

여기에 마늘즙을 조금 섞으면 더욱 연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므로 주의한다. 고기가 잘 익어갈 때 냉수에 잠깐 적셨다가 급히 건져내 다시 굽는다.

이렇게 보통 세 번을 진행한다. 여기에 참기름을 바르면서 재차 구워도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아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음식 조리과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현재 스포츠바비큐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난도 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한우 비비큐 요리 설하멱 (SBS 뉴스캡쳐)
고려시대 한우 바비큐 요리 설하멱 (SBS 뉴스캡쳐)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고기는 익어가는 과정에서 그릴에서 꺼내도 내부온도는 3도에서 5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이월효과(Carryover effect)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고기를 직접구이(DirectMethod)방식으로 구울 때 속은 안익고 겉은 타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으로 익어가는 고기를 꺼내 표면 냉각을 위해 수분을 뿌리는 기술인 수 분분사법(Spritz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한발 더 나아가 얼음이 담긴 물 속에 세 번을 넣었다 꺼내 굽는 방법이 쓰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어진 마음과 공동체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식재료의 부족함과 뚜렷한 사계절로 인해 보관상의 어려움을 다양한 방법으로 현명하게 대처해 온 영리한 민족이다. 이런 민족의 뒤를 잇는 후손으로 과거의 현명한 고기음식문화를 더욱 더 발굴,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함이 다양한 한우 소비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시급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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