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축산실록 1
그림으로 보는 축산실록 1
  • 한우마당
  • 승인 2020.01.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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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농우는 얼마나 사육되었을까?
김홍도 '논갈' 18세기 후반
김홍도 '논갈' 18세기 후반

"소 두 마리를 하나로 묶어 쟁기질을 하는 쌍겨리가 인상적이다. 소를 두 마리나 활용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겨울은 매우 춥고 건조하고,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한 기온을 가지고 있지만, 식물이 생장하기에는 적당한 기온과 강수량, 비옥한 토양이 확보되어 있어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소를 이용한 우경은 삼국시대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전부터 소를 활용해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는 농경사회에서 농작업을 위해 매우 필수적인 가축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말이 농작업에 투입되는 곳도 있었으나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지역에서는 말 보다는 소가 그 역할을 하였다.

여러 농작업 중 소가 주로 담당했던 작업은 경운작업으로 보습이나 쟁기를 소에게 끌게하여 논과 밭을 반전시키는 작업이었다.

심경(深耕)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주된 기술 중 하나인데 이 심경에 필요로 하는 힘을 축력을 사용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소가 축력을 제공하는 주된 가축이라는 것이다.

김홍도의 ‘논갈이’는 대표적인 우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민속화다.

소 두 마리를 하나로 묶어 쟁기질을 하는 쌍겨리가 인상적이다. 소를 두 마리나 활용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조선 초기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황희 정승의 여러 일화 중 하나인 검은소와 누렁이 소 중 어떤 소가 일을 잘하냐고 물었다는 일화에서도 농부는 흑우와 황우를 쌍겨리로 묶어 논을 갈고 있었다.

19세기 말 풍속화가인 김준근의 ‘농사하고’에도 쌍겨리로 밭을 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에는 농작업에 투입할 소가 많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부지방은 보통 외겨리를, 중북부 지방은 쌍겨리를 많이 이용했고 이들 모두 밭을 깊이 갈기 위한 방편이었다. 보통 화전(火田) 등을 한 척박한 땅은 쌍겨리를, 개간이잘된 평지의 땅은 외겨리를 이용하였다 한다.

두 그림 속 쌍겨리로 밭과 논을 가는 모습은 아마도 소가 많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되었을 수도 있다. 두 그림 속 논과 밭 모두 척박한 토양은 아닌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쌍겨리가 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화가의 희망이 담겼다는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세종 13년 12월 6일(1431년) 기록에 따르면 중국에서 교역을 핑계 삼아 요동 주둔군(遼東駐屯軍)에 밭을 가는 경우(耕牛) 1만두를 요청하여 조정을 곤혹스럽게 한 바가 있다.

 

김준근 〈농사하고〉 중 《기산풍속도첩》 19세기 말
김준근 〈농사하고〉 중 《기산풍속도첩》 19세기 말

조선에는 소가 본래 많지도 않은데 백성들이 실농하여 쓸 만한 농우(農牛)가 더욱 적어, 이 같은 요구대로 하면 민간에는 농우는 남김이 없게 되어 염려가 된다는 세종대왕과 조정 신하들의 우려를 전하는 대목이 그대로 실려있다.

그러면서 직접 중국 사신을 만나, 근년에 수해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소를 기를 수 없어 농우(農牛)가 있는 사람이 열 집에 한 집이 될 정도이며, 그 있는 집도 한 마리에 지나지 않다고 중국 황제에게 주청해 줄 것을 설득했고 결곡 교역 두수를 1만두에서 6천두로 감면(減免)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단종 대 의 기록을 보면 한 마을 안에 농우를 가진 자가 한두 집에 지나지 아니하며, 한 집의 소로 한 마을의 경작을 의뢰하는 것이 반이 넘는데, 만약 한 마리의 소를 잃으면 이는 한 마을의 사람이 모두 농사짓는 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한 미리의 소가 있고 없는 것으로써 한 마을의 빈부가 관계되니 소의 쓰임이 진실로 크다고 적고 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 농우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실제로 소를 소유하고 농사를 지은 농민은 많지 않았고 한 마리의 소로 마을 전체의 논과 밭을 갈았으니 소 한 마리가 마을의 빈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될 정도였다.

이런 연유로 우금은 매우 엄격히 시행되었고, 이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유배를 간 대신들도 있었다.

이처럼 경운기가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 농우의 확보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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